솔직히 많이 무섭다.
영남공업고등학교
경상공업고등학교
대중금속공업고등학교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교직에서의 6년 반.
경찰이 위장해있기도했고
정보원이 붙을꺼다 감시당할꺼라는 말을 수차례들었다.
친한선생님의 아버지는 군3급에 교육공무원이라셨고
서른다섯. 기간제자리마저 빼앗겼던 때에는
안동대학교에 입학해 신분세탁을 하란 말씀도 하셨었고
난데없이 개명을 하라고도하셨으며
재직중에는 나더러 속이 문드러져야한다고
인생의 쓴맛을알아야한다고
이바닥에 온 후로 지금부터의삶은 지금껏 삶과 반대의 삶을 살게될꺼라고
눈빛성격말투목소리 많은게 바뀌게될꺼라셨다.
교육청로비 이야기도하셨지만 초짜배기교사인 낯선 내게 그런말씀을 하실만큼 그 부장선생님은 아마추어가 아님을 잘 안다. 다른 의도가있을거라 생각하는 바이다.
이 바닥 못벗어날꺼라고 앞길이 막힐꺼라 하셨었고
2016년부터 경북대대학원을 지속적으로 권유하셨다.
2021년 기계금속임용시험. 기출될문제가 이미 정확하고 근체적으로 공유되고있던 현실을 마주하게됐고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았다.
늘상 이바닥은 공부잘하는교사, 모범적으로살아온교사 필요없다고. 인생의 방황을 많이 겪은 교사를 원한다고 늘상 말씀하셨기에...
그래서 경상공업고등학교에서 권모선생님께 정교사기회 밀렸을때 전혀 억울하지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변선생님들께서 권모선생님의 안동대재학당시 불성실했던 삶에 대해 묻지않은 말씀들을 내게 많이 해주셨지만.
어쨌거나 내 눈에 보이는 모습은. 내겐 못됐었어도 아이들에겐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것같았으니 불만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실직상태로 1년. 임용에 올인했고. 2차불합격을 끝으로 교직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힘들었다. 21살때부터 변함없이 마음에 간직하며 기도해오던 교직..
20대의 전부. 그리고 30대의 반틈이 온통 교직에 대한. 교직을 위한 노력이었다.
다른시작을 하려 경북대학교 기계대학원 풀타임으로 입학했고
자주 공개적인 무시를 당했다. 초등학생수준이라고 어린 학생들앞에서 망신을 주실때면 뇌가 망치로 맞는 느낌이었다. 내 노트를 뒤적이시며 영어필기읽어보라고, 필기하면 뭐하냐고 다그치실땐 사라지고싶었다.
랩실 오실때마다 열살어린 동생이 나의 선배이니 공부좀 배우라고 늘상 말씀하셨고
이윽고 아홉살어린 동생이 팔짱을 기고 내 실수를 야단칠때는.. 자존심도 없는사람처럼 저절로 눈물이 났다.
이게 있을수있는 상황인건가 그저 충격의 연속이었다
실험을 하게해달라고 매학기부탁드렸고 너무 간절했지만 결국 마지막학기가 되어서야 실험을 시작할수있었고 두세달 실험해서 얻은 데이터를 동생에게 다 넘겨 분석,리뷰 1저자로 동생이 쓰라고하셨단걸 전해듣게되었다.
교수님 의중이 있으실것같아 동생에게 물었다가 밤늦게까지 긴 긴 문자공격을 받았다.
그래도 물러설수없어 버텼다. 2년이 지난시점에서마저 내 데이터를 엎으셨다. 여러차례 겪어오면서 방향성제시가없는. 반대를 위한 반대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짐을 싸서 나왔다.
미운감정보다도 두려움이 컸다.
영남공업고등학교 부장선생님이 갑자기 경북대 행정직원이 되어 나타나 우리랩실을 수시로 방문하고계셨고 교수님과 행정업무를 하는 모습을 보고 예전에 들어온 말들이 생각나지않을수없었다.
여튼 그렇게 서른여덟. 대학원풀타임을 실패로 마무리지었다. 자주 두렵다. 내 다른노력조차 길이 막힐까봐 많이 두렵다. 교직을 준비하느라 7년을 기다렸었고 교직에 서서 6년반을 일했으며 그러고서도 4년이 지났다.
나는 서른아홉. 아니 법이 바뀌어 서른일곱.
많이 무섭고 무섭고 무섭다.
그간 결혼도 못했고 교직에서 소개받은 사람들과는 1회만남이 전부였다. 경찰아들, 경찰동생, 교도관, K2소속군인.. 다양하게 만났지만 만남이 진행되지않았을뿐더러 주변선생님들도 늘상 커트머리하고 임용공부하라고, 정교사될때까지는 결혼생각이나 사람만날생각은 미뤄야하지않겠냐셨다.
사실은 도움이 필요하다
많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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