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구질구질한 건 이제

공지사항 24.02.27
넌 눈 감았으니 못 봤겠지만 난 몇달 전 네 장례식을 치뤄줬어
돈이 부족해서 없던 사회성 발휘해가며 니 친구들 모으고 돈도 모은다음, 네 부모를 기다렸어

넌 아니라고 부정했겠지만 죽는 순간까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거 같았으니까.. 그래도 부모인데 와주겠지 싶었는데도

근데 그 사람들은 장례식장에도 오지 않았고 그것만으로도 네 사정을 너무 잘 알 것 같았고..


떨어질 콩고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건지 네 낡은 구형 휴대폰 메세지함을 켜보니깐 가족인걸 빌미로 돈 뜯어내려는 그 작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연락도 안하던 때가 한눈에 보였으니,

너 혼자서 계속 감정적으로 발버둥 쳤던 걸 보고서 너무 참담하고 답답한데
우린 핏줄로 연결된 가족도 아니고, 그저 서로가 가장 친한 친구였던지라 결국 제3자입장에서 무엇도 할 수가 없었던게 너무 마음이 아팠어 우린 대체 뭐였을까

마지막으로 너가 남긴 편지 모퉁이가 접었다펴졌다 자국이 지저분하고 꼬질꼬질한데
죽기 직전까지 심란해하고 혼자서 고민했을게 눈에 밟혀서 너무너무 괴로웠어

만일을 몇백번을 가정했던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멈출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전화 안 받는다고 문자보내고 마냥 기다릴게 아니라 프로젝트니뭐니 단번에 관두고 너한테 달려갈 걸 그랬어
어차피 있어봤자 한국인데 몇시간이나 걸린다고...


너가 항상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 난 괜찮다고 말하는 관계를 조금 더 공을 들여서 뜯어고쳐놨다면

상황이 나아지면 관계를 재정립하자는 시답지도 않은 소리를 할 때 무시하고 직진했다면
이것도 아니라면 다른 사람 이라도 억지로 소개 시켜줄 걸

너가 세상에 남을 미련 하나라도 있었다면 내가 그 옆이 아니라할지라도 누구라도 좋았을텐데.

죽은지 몇개월이나 지났고 앞으로도 영원히 쭉 넌 나보다 어리다는 사실이 구질구질하고 괴롭고 바보같아
내가 너 놀릴려고 연하 좋다고 말했더니 너가 째려봤던 거 왜 쓴거야? 진짜 짜증난다.. 유서에 이런 얘긴 왜 썼어? 나 죽이고 싶어서 작정한 거지? 이런식으로 연하의 꿈을 이뤄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는데 끝까지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하지 넌.

장례식비용 같이 대준 니 친구들은 군대를 가고 취업준비를 하고 여전히 놀기도 하고 매일이 구질구질하더라도 숨쉬며 살아가는데 넌 영원히 너가 원치 않게 떠밀려 내려가던 그 동네 작은 모서리에서 고여있겠구나 싶어서 그 어둠이 마음이 아파

내가 이런 말한다고해서 무언가 달라질 거란 생각은 안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날 위한 편지를 쓸게 아니라 전화를 받아줬다면 좋았을텐데

바보같이 삽질만 하는 네 성격을 몰랐던 거 아니야
넌 나랑 연인이 되고싶다고 했지.
난 연인같은게 아니라 너랑 가족이 되고 싶었어

날 무지막지하게 때리더라도 막상 버리기엔 마음에 부채감이 쌓이는, 절대 버릴 수 없는 그런 지긋지긋한 관계 있잖아
그러니까 저런 내가 겪어온 것과는 많이 다른 지긋지긋하지만 조금더 따뜻하고 끈끈한 걸로 너랑 이어가고 싶었어.

먼 훗날 마흔살? 쯤 됐을때 우리 어둡고 더럽던 때를 떠올리면서 그 땐 그랬지 그 땐 뭐가 그리도 겁이 많고 어지러웠던 건지 하고 손 잡고 평화롭게 티비를 보는 그런 미래를 가끔 상상하곤 했어

꼴 좋다
난 머리도 안좋고 하루하루 너무 바빠서 널 생각보다 빨리 잊을지도 모를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미련 많은 인생따위 원하지 않았는데 모든게 망가지고 끈적끈적하고...

종교적 믿음도 가르침도 난 없지만 다음 생이 있다면 이라는 생각을 끝도 없이 하고, 그 세상엔 네 입술에 피딱지가 없는 나날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또 바라며 결론을 내렸어

우리 그냥 다음생엔 마주치지 않는걸로 할래? 네 삶의 미련 한조각도 될 수 없는데 우리가 다시 만나서 뭐하겠어

또 구질구질하게 눈치보고 도망가고 다시 붙잡고 그런 밀당같은 거나 하면서 웃다가 울다가 껴안다가 별 염병을 하겠지 이젠 떠올리는 것도 안하고 싶어
떠올리면 괴로워져

그냥 우리가 가진 것들의 완전 정반대로 태어나는 거 어때?
넌 널 사랑해주는 도박안하고 건실한 부자 부모님 만나고, 난 서로 싸우지 않고 날 때리지 않는 멋진 부모를 만나고.

그렇게 스쳐지나가고 각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하고 지난 인연따위 기억도 못해서 아플일도 없는 그런 예쁜 인생 어때? 내가 너랑 꿈꿔왔던 거 같은걸로..

우리 손만 간신히 잡았는데 뭐가 이렇게 딥하냐고 비웃으면 할 말이 없어 난 모든 미래에 너가 있었으니까...

뒷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걱정마
나 뭐든 너보다 한 발 느리지만 그래서 너가 놓치는 것들 잘 주워담아왔잖아
이번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분명.

혹시 원망같아 보이는 말이 보인다면 그냥 너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하는 타령같은 거라고 생각해주라..
난 뭐든 너가 다 처음이었어서 좋아함 그 이상의 감정도 정확시 인지한 적이 없어
입 밖으로 꺼내기 어색하고 모호하고 그래서 더 정확한 거 같기도 하는 거 그래 그거 사랑같은 거 있잖아 .. 우리가 해놓고도 빡빡 지워버린거


네 유서는 고백으로 끝나는 죽음이 명확히 보이던데..
내 글에도 보일거 아냐 유서같은 내 고백이

과일 벗겨 알맹이만 골라먹듯이 낱낱이 보일 걸 알아. 유서같은 편지를 적다보면 결국 진심을 고백하게 될테니까
우리가 한게 뭔지 더 뚜렷하게 보였겠지...

이젠 됐어.. 넌 무교라서 자살한다고 해도 벌 안 받을 거고 구천을 떠돈다고해도 착하고 순해빠져서 네 부모는 원망도 안하고 피해주기 싫어서 서둘러 사라질거잖아.. 내가 널 잊고 더 좋은 남자 만나길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을 거 같아서 조금 짜증도 나..

미친 마음마냥 시대착오적으로 따라 죽지 않을거야
내가 좀 우울하긴 해도 설마 널따라 죽을리 있겠어?


설령 널 따라 죽는다고 해도 난 널 느끼지 못해
어차피 네 몸은 화장하는 바람에 형태가 없어서 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거야
그래도 넌 재가 된다면 그깟 인간의 몸에 제한되지 않을 더 자유로운 몸으로 멀리멀리 도약하겠지..

있잖아 혹시 내 곁에서 내 편지 혹시 보고 있다면 나 꼭 안아주고 가면 좋을 것 같아
난 너가 가는 길을 살아가는 동안 따라가고 싶어

너가 떠나기 전에 나를 안아주고 간다면, 정말 어쩌면 그 온도를 의지하며 죽음따위를 가로질러 용감히 횡단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난 오늘도 형태가 없는 어떤 재에 대한 꿈을 꿔
그건 따뜻한 거 같기도 하고, 금방 손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기도 해 악몽일까 뭘까 아직은 못 정해서 괜찮아.

기분 나빴어? 진짜 너무너무 구질구질하지?
네 인생을 온전히 보듬고 이해해보는 것에 내 인생을 바치기로 했으니 이 정도는 넘겨줘

부디 평안한 죽음이 되기를 바라
오늘로 구질구질한 건 이제 진짜 안녕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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